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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그에 대해 알아보자

sdfdfs3f 2024. 10. 23.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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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李明博, Lee Myung-bak)은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으로 2008년 2월 25일부터 2013년 2월 24일까지 재임하였다. 이명박은 1941년 12월 19일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경상북도 포항에서 성장했다. 이명박은 고려대학교 상과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였으며, 학창 시절부터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키웠다. 재임 이전에는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하며 도시 발전과 경제 활성화를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고,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이명박은 경제 성장을 중시하며 '747 공약'을 통해 연평균 7% 성장, 4만 불의 국민소득 달성을 목표로 하였다. 이를 위해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와 국제 협력을 강화하였으며, 해외 자원 확보와 무역 확대를 위한 외교 전략을 펼쳤다. 그러나 이명박의 정부는 부동산 가격 상승과 양극화 문제 등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한, 이명박 정부는 언론 자유와 인권 문제에 대한 우려를 일으키며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키기도 하였다. 이명박은 또한 개인적인 측면에서도 다양한 가족을 두고 있다. 이명박의 배우자 김윤옥과의 사이에 4명의 자녀가 있으며, 경주 이씨 집안 출신으로 전통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인물이다. 재임 후, 이명박은 정치적 논란과 함께 여러 가지 법적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이는 이명박의 정치적 유산에 복잡한 영향을 미쳤다. 이명박은 현재도 한국 정치와 사회에서 여전히 논의되는 인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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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

 

이명박(李明博, Lee Myung-bak)은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으로 재임하였다. 이명박의 생애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으며 발전해 온 과정을 담고 있다.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이명박은 포항에서 자라며 교육을 받았고, 고려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후 현대건설에 입사하여 경영자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이명박은 이후 다양한 기업에서 대표이사직을 맡으며 경영 능력을 인정받았고, 한국포장건설, 인천제철, 한국도시개발 등 여러 기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명박은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에 처음으로 당선되었으며, 이후 서울특별시장으로 선출된 후 지역 개발과 도시 혁신에 기여하였다. 2007년에는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2008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이명박의 정부는 경제 성장과 대외 경제 관계 강화에 중점을 두었으며, '747 공약'을 통해 연평균 7% 경제 성장과 4만 불 국민소득 달성을 목표로 하였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부동산 가격 상승과 사회 양극화 문제 등으로 비판받기도 하였다.

 

이명박은 대통령 재임 후에도 다양한 국제적 역할을 맡아왔다. 이명박은 캄보디아 훈 센 총리의 경제 고문으로 활동하며, 여러 대학으로부터 명예 학위를 수여받았다. 이명박의 정치적 경력과 경영 경험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많은 논의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이명박은 지금도 중요한 정치적 인물로 남아 있다. 이명박의 복잡한 유산은 현대 한국 사회와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임을 증명한다.

 이명박: 생애와 경력의 연대기

 

이명박(李明博)은 1941년 12월 19일 일본 오사카의 조선인 마을에서 태어났다. 이명박은 아버지 이충우와 어머니 채태원의 4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당시의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아래 있었다. 아버지 이충우는 원래 포항 흥해읍 출신이었으며, 대구 반야월 출신의 채태원과 결혼 후 일본으로 건너가 목장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이명박은 형제들과 이름에서 차별화된 존재로 여겨졌는데, 이는 어머니가 그를 임신했을 당시 보름달이 치마폭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밝을 명(明)’과 ‘넓을 박(博)’으로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 족보상으로는 다른 형제들과 같은 돌림자를 지닌 이름인 이상정(李相定)으로 올라가 있어, 이는 후에 대선 후보 시절 이명박의 혈연관계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광복 이후, 이명박은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 경북 영일군 흥해읍 덕실마을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이명박이 한국에 돌아온 여객선이 침몰하면서 일본에서 모아둔 재산을 잃고 극빈층에 빠졌다. 이명박의 어린 시절은 6.25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어졌으며, 전쟁 중 이명박의 형제들이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러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이명박은 중학교에서 수재로 소문났고,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포항 동지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대학 시절과 민주화 운동

 

이명박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올라가 일당 노동자로 생활하며 대학 입시를 준비하였다. 1961년 고려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하게 되었고, 대학 시절 이명박은 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6.3 항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박정희 정부의 한일 수교 강행에 반대하며 시위에 참여했으며, 이로 인해 수배령이 내려졌다. 결국 이명박은 자수하여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6개월간 수감되었다. 이 시기는 이명박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회고된다.

 현대건설에서의 경력

 

복학 후 이명박은 현대건설에 입사하여 빠른 승진을 거듭했다. 1965년에 경리과 평사원으로 시작해 1988년에는 회장에 올랐다. 이명박은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이라크 건설 수주 등에 기여하였으나, 이라크에서의 공사 미수금 문제로 비판받기도 했다. 또한, 이명박이 입사했던 당시 현대건설의 성장은 정주영 회장의 리더십 아래 이루어진 것이지 이명박의 개인적 성취로만 해석되기 어려운 점이 지적된다.

 

 정치 진출과 대통령 선거

 

1992년, 이명박은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14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치에 입문하였다. 이후 이명박은 한반도 대운하 구상을 제안하고, 1995년 서울특별시장 선거 후보로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이명박은 이후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명박 정부는 경제성장과 4대강 사업 등의 정책으로 주목받았으나, 여러 논란과 비판에 휘말리기도 했다.

 

이명박의 생애는 전쟁, 가난, 학생운동, 기업 경영, 정치 진출 등 다양한 경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명박이 겪은 역경은 이명박의 정치적, 경제적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명박의 이야기는 한국 현대사에서 한 개인의 삶이 어떻게 국가의 역사와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남아 있다.

 이명박 정부의 주요 사건 및 퇴임 이후 행적

 

이명박 정부는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재임한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 이명박의 통치 시기를 일컫는다. 이 시기에 있었던 주요 사건들은 한국 사회와 정치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이명박의 퇴임 이후 행적 또한 큰 주목을 받았다.

 

 재임 시절 주요 사건

 

이명박 정부는 여러 사회적, 경제적 사건들을 겪었다.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방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후 교육과정 개편 및 수능 등급제 환원 등의 정책이 시행되었다. 또한 한미 FTA 체결과 광우병 논란으로 인해 대규모 촛불집회가 발생하였고, 이는 국민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2009년에는 용산참사와 신종플루 확산이 있었으며, 자원 외교가 시행되었다. 이명박 정부는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추진하였으나, 강한 반발로 인해 포기하였다. 대신 4대강 사업을 추진하여 완공하였다. 이 외에도 천안함 피격 사건, 연평도 포격전 등과 같은 안보 사건이 발생하였고, 2011년에는 제5차 G20 정상회의를 개최하였다.

 

2012년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일본 천황 사과 요구가 있었고, 이는 일본과의 외교 문제를 야기했다. 퇴임 직전에는 4대강 정비 사업과 자원 외교 관련 비리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이러한 논란은 이명박의 재임 기간 동안 국민의 신뢰에 큰 타격을 주었다.

 퇴임 이후 행적

 

이명박은 퇴임 이후에도 정치적 활동을 이어갔다. 2012년 대선 과정에서 박근혜 후보에 대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감은 희석되었다. 퇴임 후에는 사무실을 마련하고 재단활동을 하며 개인적인 사업을 벌였다. 이명박은 해외 순방을 통해 대외 행사에 참여하며, 캄보디아 총리의 경제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2016년에는 차기 정권 창출에 기여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으나, 내부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이명박은 박근혜 전 대통령 및 현 정부에 대한 비판을 하였고, 탄핵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이명박은 2018년 3월 22일 구속영장이 인용되었고, 2020년 대법원에서 징역 17년과 벌금 130억 원의 형이 확정되었다. 이명박의 수감 생활은 여러 논란을 일으켰으며, 2022년 윤석열 정부에 의해 특별사면을 받게 되었다.

 

퇴임 이후 이명박의 여론은 극과 극으로 나뉘었으며, 과거의 정치적 행보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명박의 정치적 유산은 한국 사회에서 계속해서 중요한 담론으로 남아 있으며, 이명박의 행동은 후임자와 정치적 지형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정부의 재임 시기와 그 이후의 행적은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며, 이는 정치적 비판과 평가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명박: 경과와 업적, 그리고 개인적 이야기

 

이명박(李明博)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이명박의 족보 이름은 이상정(李相定)으로, 형 이상은과 이상득처럼 '상(相)' 자 돌림이다. 이명박이라는 이름은 이명박의 어머니가 그를 임신했을 당시 보름달이 치마폭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기 때문에 '밝을 명(明)'과 '넓을 박(博)'으로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유년 시절에는 일본에서 거주하며 창씨개명한 이름이 츠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월산명박)였다.

 

이명박은 서울특별시장, 대통령,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기업 CEO 출신 대통령이라는 독특한 경력을 지닌 인물로 알려져 있다. 2003년, 서울시장이던 이명박은 유명한 게임인 스타크래프트를 즐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1979년 한양대학교에서 열린 제1회 새마음제전에서 박근혜 영애와 최순실과의 인연을 가지며 정치적 연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명박은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다. 이명박의 임기 중 서울특별시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명박은 다양한 경제 정책을 도입하였고 경부고속도로와 같은 대형 프로젝트의 관리 감독을 맡기도 했다. 이명박의 대통령 임기 동안 논란이 되었던 점 중 하나는 2010년 오른쪽 눈 백내장 수술 이후 안경을 착용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명박의 독특한 개인적 이력은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를 유발했다. 생일과 결혼기념일, 대통령 당선일이 모두 12월 19일로 같아 '트리플 크라운 데이'로 불리며, 매년 전날인 12월 18일에는 친이계 출신 전현직 의원들이 모여 송년회를 겸한 생일잔치를 열곤 했다. 이러한 개인적인 이야기는 이명박이 단순한 정치인 이상의 삶을 살았음을 보여준다.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이명박은 여러 가지 사건과 상황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이명박은 천안함 피격 사건 및 연평도 포격전과 같은 국가적 사건에도 깊이 관여하며, 매년 관련 기념식에 참석하여 국군의 희생을 기렸다. 또한, 이명박은 미국의 조지 워커 부시 전 대통령과 친분이 있었으며, 이는 이명박이 국제 정치에서도 중요한 인물임을 시사한다.

 

이명박은 정치적 경과와 함께 많은 인물들과의 인연을 맺어왔다. 이명박의 형 이상득 및 이상은과의 관계는 물론, 정치적 동지들인 이재오, 정운찬, 유인촌과의 사적인 친분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이명박은 대통령 후보 시절, 과거 학생 운동 시절의 사진이 잘못 유포되었으나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졌다.

 

이처럼 이명박은 단순한 정치적 인물에 그치지 않고, 이명박의 삶의 다양한 측면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인물로 평가된다. 이명박의 정치적 성향, 개인적 일화, 그리고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는 이명박이 한국 정치사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이명박은 한국의 현대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 인물로, 이명박의 정치적 여정과 개인적 이야기는 앞으로도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전 대통령: 정치적 여정과 개인적 인연

 

이명박 전 대통령은 한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더불어 상당한 자덕으로 알려져 있다. 이명박은 퇴임 이후에도 자전거를 즐기며 친한 동료인 이재오와 종종 함께 타고 다니곤 했다. 또한, 정규재와 함께 4대강 자전거길 투어를 하며 여가를 즐겼다. 이명박은 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이재오와 정운찬을 차기 대선 주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고, 특히 이재오와의 관계는 매우 친밀했다. 이재오가 대선 출마를 선언했을 때 이명박은 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당시, 이명박은 이재오, 반기문, 홍준표, 유승민 등 여러 후보자와의 관계를 통해 정치적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이명박은 이재오가 대선 후보로 가장 적합하다고 언급하며, 친이계 및 보수계 정치세력의 위기 속에서도 이재오를 지지하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이명박이 이재오와 정운찬 등을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고자 했음을 나타낸다.

 

과거에는 박원순과도 상당한 친분이 있었다. 이명박은 서울시장 재임 시절 박원순이 설립한 아름다운 재단에 월급 전액을 기부하며, 이 재단의 명예고문으로도 활동했다. 두 사람은 한 달에 한 번 만나 정책적 조언을 주고받는 등 활발한 교류를 이어갔지만, 이명박이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박원순이 그를 비난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퇴임 이후 이명박은 기존의 논현동이 아닌 내곡동으로 이사하려 했으나, 아들 이시형의 내곡동 사저 매입 의혹으로 인해 거주지를 논현동에 그대로 두었다. 이명박은 대통령이 되기 전인 2007년에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경우 최태민 일가의 국정농단이 있을 수 있다는 발언을 했는데, 이는 뜻밖에도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 대해 알고 있었던 이들은 대체로 침묵을 선택했으며, 이명박 역시 박영선, 정봉주가 BBK 및 다스 관련 의혹을 지속적으로 제기했던 점에서 박근혜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침묵을 지킨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상도동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강삼재, 서청원 및 민주당으로 이적한 일부 인물들과는 현재 거의 친분이 없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강삼재는 이명박이 정계에 입문했을 당시부터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고, 서청원과의 관계도 한때 친분이 있었으나 친박계로 이적한 이후에는 소원해졌다.

 

이명박이 존경하는 인물로 도산 안창호를 꼽았다는 점은 이명박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이명박은 대통령 재임 중 청와대 홈페이지에 기재된 바와 같이 가훈으로 ‘정직’을 강조했다. 이명박의 전 측근인 정두언은 이명박이 하늘의 보호를 받는다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정두언 개인의 주장이므로 신중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명박은 직접 나서서 모든 책임을 지고 일을 처리하는 성향이 강하며, 이는 "내가 직접 나서겠다"라는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13대 노태우부터 17대 이명박까지의 대통령들은 2월 25일에 취임하여 2월 24일에 퇴임함으로써, 이명박이 기존 헌법에 따른 마지막 대통령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현재 이명박은 교도소에서 지내며 지지자들에게 편지를 답장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2023년에는 사면 후 청계천을 방문해 시민들과 만나며 여전히 정치적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 이명박은 퇴임 이후 TV 뉴스나 정치 프로그램을 전혀 보지 않으며, 오로지 스포츠 방송만 본다고 밝혔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책방을 열었다는 질문에 대해서는 특별한 계획이 없다고 전했다. 이러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정치적 여정과 개인적 인연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일면을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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