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희의원

박덕흠 : 대한민국 제19-22대 국회의원, 그에 대해 알아보자.

celebrity_blog 2024. 12. 12.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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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덕흠은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태어나, 한국 정치의 중추적인 인물로 자리 잡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다. 1953년 10월 18일 출생한 박덕흠은 서울산업대학교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연세대학교와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각각 석사와 박사 과정을 마친 후, 건설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아갔다. 특히 그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활동하며 교육에도 기여한 바 있다. 박덕흠의 정치 경력은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으며, 그는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후보로 당선되며 정치무대에 발을 들였다. 이후 제20대, 제21대 국회에서 연속적으로 당선되었고, 제22대 국회에서도 국민의힘 소속으로 당선되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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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정치 경력은 단순히 국회의원 활동에 그치지 않는다. 박덕흠은 국회에서 여러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다. 제20대 국회에서는 국토교통위원회 간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교통과 건설 분야에서 깊은 이해와 실력을 발휘했다. 또한, 제21대 국회에서는 정보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한반도 경제와 외교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국회에서의 활발한 활동을 통해 중소기업과 지역 발전, 건설 정책을 중점적으로 다뤄왔으며, 충청북도의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박덕흠은 정부의 정책 방향에 대해서도 중요한 의견을 제시하며,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뿐만 아니라 박덕흠은 다양한 사회적 활동과 조직에서의 리더십을 발휘해왔다. 대한전문건설협회 중앙회 회장, 국민생활체육전국검도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건설 및 체육 분야의 발전에도 기여한 그는 여러 비영리단체와 협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는 또한 중소기업 법제관으로서 중소기업의 법적 환경 개선을 위한 활동을 펼쳤으며, 다양한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의 정치적 여정은 지역사회와 국가 발전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였으며, 많은 이들에게 정치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였다.

박덕흠: 대한민국 건설업자 출신의 정치인, 국민의힘 소속 4선 국회의원

 

박덕흠 의원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충청북도 보은군, 옥천군, 영동군, 괴산군을 지역구로 하는 국민의힘 소속의 제22대 국회의원이다. 건설업계에서의 경력을 바탕으로 정치의 세계로 진출한 박덕흠은 지역사회와 건설산업 발전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 온 인물이다. 그의 생애와 정치적 여정은 단순한 국회의원 경력을 넘어, 건설업과 정치,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의 연결고리를 엮어가는 복잡하고도 깊이 있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1. 생애와 초기 경력

 

박덕흠은 1953년 10월 18일, 충청북도 옥천군 안내면 현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지역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자란 그는 옥천 안내초등학교와 옥천중학교를 졸업한 후, 고등학교 졸업 학력 검정고시를 통해 고등학교를 마쳤다. 이후 그는 서울산업대학교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연세대학교 산업대학원에서 토목공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는 등, 건설 분야에서의 전문성을 쌓았다. 또한,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건설환경공학 박사 과정을 이수하며, 건설 분야에 대한 심화 지식도 확보했다.

 

박덕흠은 1973년, 육군에 입대하여 수도경비사령부에서 포병 하사관으로 복무하였고, 1977년 중사로 전역했다. 군 복무를 통해 얻은 조직과 리더십 경험은 이후 그의 정치적 경로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군 제대 후 그는 건설업계에 뛰어들어 1983년에 원화건설을 창립하며 건설업에 발을 들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다양한 시설물과 포장공사를 담당하며, 건설업의 핵심 분야에서 경험을 쌓았다. 또한 2003년에는 서울특별시전문건설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2006년부터 2012년까지 대한전문건설협회 중앙회 회장을 역임하며 중소 건설업체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정치로 전향할 때 큰 자산이 되었으며, 건설업계와 정치계를 잇는 중요한 교두보가 되었다.

2. 정치 활동: 건설업자에서 정치인으로

 

박덕흠의 정치적 행보는 2008년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에서 시작되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구로구 을 선거구에 공천을 신청했지만, 경선에서 고경화 후보에게 밀려 탈락했다. 이후 2010년 서울특별시 광진구청장 선거에 출마하려 했으나 지역 주민들의 반발로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2012년, 그는 다시 충청북도 보은군, 옥천군, 영동군을 지역구로 출마하며 새누리당(현재 국민의힘) 소속으로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했다. 이 선거에서 그는 민주통합당의 이재한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으며, 이를 기점으로 정치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박덕흠은 친박계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박근혜 전 대통령의 정책을 지지하는 인물로 알려졌다. 또한 그는 포럼 오늘과 내일이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싱크탱크에 참여하며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는 보은군, 옥천군, 영동군, 괴산군을 지역구로 출마하여 더불어민주당의 이재한 후보를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2017년, 반기문 전 총장의 대선 출마를 지원하기 위해 새누리당에서 탈당을 선언한 뒤, 다시 입당하며 당내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미래통합당소속으로 출마하여 58,490표(56.88%)를 득표하며 3선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후, 이해 충돌 논란이 불거지며 국토교통위원회에서 사임하고, 국민의힘을 탈당한 뒤 무소속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국민의힘에 복당했다.

 

2024년, 그는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의힘 후보로 출마하여 4선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박덕흠은 국회 부의장직에 도전했으나 주호영 의원과의 경선에서 패배했다. 최근에는 2024년 12월 7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 소추 표결에 불참하기도 하여, 여전히 정치적으로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다.

3. 논란과 여파

 

박덕흠 의원의 정치적 경로는 논란과 맞물려 있었다. 가장 큰 논란 중 하나는 이해 충돌과 관련된 문제로, 그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주 건설업과 관련된 정책에 개입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2020년에는 국토교통위원회에서 사임하면서 논란을 일으켰고, 국민의힘을 탈당한 뒤 다시 복당하며 논란이 커졌다. 또한 그는 윤석열 캠프의 충북지역 총괄선대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나, 같은 이유로 명단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덕흠은 지역 주민들과의 소통을 강조하며 정치 활동을 이어왔다. 그는 보좌관 등을 통해 지역 주민들의 생일이나 경조사를 챙기고, 사무실 전면에 사업 예산 확보 상황 등을 알리는 등 민심 관리에 신경을 썼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맞닥뜨린 논란과 정치적 위기는 여전히 그에게 중요한 정치적 과제로 남아 있다.

4. 경력과 사회적 영향력

 

박덕흠은 단순히 국회의원으로서 활동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그는 서울산업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한국건설산업품질연구원 이사장,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이사장등을 역임하며 건설 산업의 발전을 위한 정책 연구에 기여했다. 또한 대한전문건설협회 중앙회 회장으로서 중소 건설업체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전문건설공제조합 운영위원장, 전문건설협회 회장등 건설업계에서의 경력도 풍부하다.

 

박덕흠은 지역 경제의 발전과 건설 산업의 혁신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며, 정치 외에도 사회적 책임을 다해왔다. 그의 정치적 행보와 사회적 기여는 건설업계와 지역 사회를 위한 지속적인 발전의 기초가 되어왔다.

결론

 

박덕흠은 건설업계 출신 정치인으로서의 강점을 살려 지역사회와 국가 발전을 위한 역할을 지속해왔다. 그의 경력은 단순히 정치인으로서의 활동에 그치지 않고, 건설업의 발전, 중소기업의 지원, 그리고 지역 주민과의 소통을 통해 많은 영향을 미쳤다. 비록 그의 경로는 논란과 도전으로 가득했지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 주민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정치적 입지를 확대해왔다. 앞으로도 그의 정치적 행보는 한국 정치와 건설업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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