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혁 : 국민의힘 국회의원, 그에 대해 알아보자.
장동혁(張東赫, Jang Dong-hyeok)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대창리에서 1969년 6월 2일에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 장씨이며, 대창국민학교와 웅천중학교, 대천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불어교육과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벨기에 루뱅 가톨릭 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 석사 과정을 마치며 학업을 이어갔다. 종교는 개신교(예장통합)이며, 가족으로는 배우자 곽민과 슬하 1남이 있다. 군 복무는 공군사관학교 중위로 1995년 7월 1일부터 1998년 6월 30일까지 복무했다.
장동혁은 법조인 출신 정치인으로, 제35회 행정고시에 합격하며 공직에 입문했고, 충청남도교육청 사무관으로 근무했다. 이어 제43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제33기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대전지방법원 판사, 인천지방법원 판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자문관(파견 판사), 서울중앙지방법원 판사, 광주지방법원 부장판사 등을 역임하며 법조계에서의 경력을 쌓았다. 이후 미래통합당(국민의힘)의 대전광역시당위원장과 유성구 갑 당협위원장을 거쳐 정치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며 제21대 국회의원(충남 보령시·서천군 / 국민의힘)으로 당선되었고, 이후 원내대변인, 사무총장 등 당의 주요 직책을 맡아 활동했다. 제22대 국회의원으로 재선에 성공하며 원내수석대변인, 수석최고위원직을 역임하고 있다.
장동혁은 국민의힘 소속으로 충남 보령시·서천군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활동 중이다. 그의 SNS 활동으로는 홈페이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X(구 트위터), 유튜브, 네이버 블로그, 네이버 밴드를 운영 중이며, 이를 통해 지역구 주민들과 활발히 소통하고 있다.
장동혁: 가난한 집안에서 출발해 법조계와 정치계의 길을 걸은 입지전적 인물
장동혁(1969년 6월 2일 ~ )은 대한민국의 법조인 출신 정치인이자, 국민의힘 소속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이다.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대창리 한내마을에서 태어나, 가난이라는 현실 속에서 성장하며 고난의 시간을 겪었고, 이를 극복하며 법조계와 정치계라는 두 굵직한 무대 위에서 자신만의 족적을 남겨왔다.
가난 속에서도 꿋꿋이, 소년 시절의 고난
장동혁은 어린 시절부터 가난의 그늘 속에서 살아야 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교 급식을 먹을 수 없었고, 매번 점심시간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 허기를 달래야 했다. 그 배고픔의 기억은 이후 그의 인생의 강렬한 동기부여가 되었고, 가난을 딛고 일어서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심어주었다. 그는 1982년 보령 대창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85년에는 웅천중학교를 거쳐 대천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그는 집안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일찌감치 진로를 고민했다. 학비가 면제되는 육군사관학교나 경찰대학 진학을 꿈꾸며 공부했으나, 우연히 서울대학교에 진학한 선배로부터 "서울대를 가면 고등학생 과외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 수 있다"는 조언을 듣고, 오로지 공부에 매진했다. 결국 그는 1988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불어교육과에 입학하며 그 꿈을 이루었다.
공직과 법조, 그리고 다시 정치로
서울대학교 재학 중이던 1991년, 장동혁은 제35회 행정고시 교육행정직에 합격해 1993년 교육부 사무관으로 임용되었다. 당시 그는 부여고등학교 행정실장으로 근무하며 공직 생활의 첫 발을 내딛었고, 이후 군 복무를 위해 공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임관해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중위로 전역했다. 군 복무를 마친 후에는 대통령자문 새교육공동체위원회와 교육부 등에서 근무했지만, 행정의 길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오히려 법조계로의 도전을 결심하게 되었고, 1999년 교육부를 사직하고 사법시험에 도전했다. 그리고 2001년, 행정고시에 합격한 지 정확히 10년 만에 제43회 사법시험에 합격하며 법조인의 길로 들어섰다.
판사 생활은 그의 인생에서 또 다른 전환점이었다. 대전지방법원에서 판사로 임용된 이후 인천지방법원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근무하며 다양한 사건을 다뤘고, 2014년부터 2015년까지는 프랑스 국립사법관학교에 파견되어 연수를 받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프랑스의 법제도와 유럽 대륙법의 흐름을 접하며 법률적 식견을 넓혔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자문관으로 파견되어 최순실 재산몰수 특별법 법안 작성에 참여하기도 했고, 2019년부터는 광주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재직하며 법원의 주요 사건을 다루는 책임 있는 역할을 수행했다.
정치의 길로 들어서다
장동혁의 정치 입문은 다소 극적인 계기에서 비롯되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자명예훼손죄 재판을 맡던 도중 판사직을 사임하고, 자유한국당에 입당하며 정치권에 발을 들였다. 이후 법무법인 베스트로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며 법조계 경력을 이어가던 그는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미래통합당 후보로 대전 유성갑에 출마했지만, 민주당의 현역 의원 조승래 후보에게 패하며 고배를 마셨다. 낙선 후에는 벨기에 루뱅 가톨릭대학교에서 법학 석사과정을 밟으며 공부했고, 귀국 후 국민의힘 대전시당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2022년에는 김태흠 의원의 충남도지사 출마로 공석이 된 보령·서천 지역구 보궐선거에 국민의힘 후보로 전략공천을 받아 출마했고, 민주당 나소열 후보를 1,500여 표 차로 따돌리며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이 당선은 장동혁에게 정치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후 그는 보령과 서천 지역에서 활발한 의정활동과 국비 확보를 통해 지역 발전을 위해 힘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국회에서의 존재감과 갈등의 정국
2023년 말, 그는 한동훈 비대위 체제에서 당 사무총장으로 발탁되며 주목받았다. 초선 의원임에도 당의 핵심 요직에 오른 것은 파격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이는 그의 실무능력과 정치적 감각이 인정받은 결과였다. 하지만 2024년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참패하자 사무총장직에서 물러나 책임을 졌고, 그 해 5월에는 국민의힘 원내수석대변인에 임명되며 다시 당의 중심으로 복귀했다. 이후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과의 관계에서 다소 선을 그으며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특히 2024년 말 윤석열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는 복잡한 입장을 보였다. 국회 본회의에서 비상계엄 해제요구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국민의힘 의원 18명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고, 탄핵안 통과 후에는 최고위원직 사퇴를 가장 먼저 표명하며 책임 있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후에는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을 드러내며 당내 친윤계 의원들과 함께 대통령 관저 앞 시위에 동참하기도 했다. 계엄 특검법 발의에는 참여하지 않으며 소신을 지켰고, 논란이 된 국정원 메모 사건에서는 진화론에 빗댄 비유를 사용해 비판받기도 했다.
정치인의 길, 그 끝은 어디로?
2025년 4월, 장동혁은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한동훈 대표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해 수석최고위원에 선출되며 또 한 번 정치적 부상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해 10월 재산 3천만 원 축소 신고 혐의로 기소되며 논란에 휘말렸고, 이에 자진해서 법제사법위원회 사임을 요청하며 사법 처리에 임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후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이 과정에서 여야의 미묘한 정치적 계산과 입장이 교차하며 그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장동혁은 한국 사회에서 입지전적인 인물 중 하나다. 가난한 소년에서 행정고시 합격자, 법조인, 국회의원으로 성장한 그의 삶은 "성실함"과 "끊임없는 도전"의 다른 이름이다. 행정·사법·입법의 세 영역을 모두 경험한 드문 인물로서, 그의 정치적 여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앞으로 그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한국 정치사의 한 페이지에 어떤 흔적을 남길지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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