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득(李相得)은 1935년 11월 29일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으며, 대한민국의 제17대 후반기 국회부의장을 역임한 정치인입니다. 이상득의 정치 경력은 민주정의당에서 시작해, 신한국당과 한나라당 등 다양한 정당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국회의원으로 6선의 경력을 쌓았습니다. 또한, 이상득은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의 정책분과 상임위원, 주한 세네갈 명예총영사 등으로도 활동하며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의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이상득은 경상북도 영일군·울릉군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으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한나라당의 여러 직책을 맡으며 당의 정책 방향 설정에 기여했습니다. 특히 이상득은 제15대 국회 전반기 재정경제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경제 정책에 깊이 관여했으며, 제17대 국회에서는 후반기 부의장으로서 국회의 운영을 책임졌습니다. 이상득의 활동은 한국 정치의 다양한 변화와 함께해왔으며, 이상득은 당내 외교 및 정책 전략 수립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2024년 10월 23일, 이상득은 서울특별시에서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상득의 유산은 한국 정치사에 큰 흔적을 남겼으며, 후배 정치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상득의 가족으로는 장남 이지형과 두 딸 이성은, 이지은이 있으며, 형 이상은, 남동생 이명박 등과 함께 고향 경주 이씨 가문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상득: 대한민국 국회부의장을 역임한 6선 국회의원
이상득(李相得)은 1935년 11월 29일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제17대 후반기 국회부의장을 역임한 6선 국회의원입니다. 이상득은 경상북도 영일군에서 성장하며 포항 동지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으나 부상으로 중퇴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1979년 코오롱그룹에 입사하여 대표이사 및 사장직을 맡았습니다. 1987년부터는 산업연구원 이사로 활동하며 경제 전문가로서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당선된 이래, 이상득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연이어 당선되었습니다. 특히 이상득은 한나라당의 정책위의장, 원내총무 등을 역임하며 당내 주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는 제17대 국회 후반기 국회부의장으로 정치적 최고 위치에 올랐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 과정에서도 이상득은 중요한 역할을 맡아, "형이 없었으면 이명박 대통령은 만들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상득은 2024년 10월 23일, 향년 88세에 숙환으로 사망했습니다. 이상득은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지병으로 치료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으며, 동생인 이명박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인사들이 이상득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였습니다. 이상득의 정치적 유산은 이상득의 지역구와 당내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이며, 한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기억될 것입니다.
이상득: 사건사고와 정치적 논란
이상득(李相得)은 대한민국의 정치사에서 여러 사건사고와 논란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로, 특히 저축은행 비리와 포스코 비리 사건이 이상득의 경력에 큰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2012년 이명박 정부 말기에 이상득은 솔로몬·미래저축은행으로부터 7억6000만 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정두언과 함께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이 사건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의 친형이 구속되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징역 1년 2개월의 실형이 확정되었습니다. 2013년 9월 8일, 이상득은 만기 출소하였으나, 이명박 대통령이 퇴임 직전 형의 사면을 시도했으나 여론의 반발로 포기한 바 있습니다.
이후 2015년 포스코 비리와 관련하여 검찰 수사를 받으며 제3자를 통해 금품을 수수한 혐의가 제기되었습니다. 2016년 11월, 검찰은 징역 7년과 벌금 26억 원을 구형했고, 2017년 1월에는 1심에서 징역 1년 3개월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재판부는 이상득의 고령과 건강 상태를 고려하여 법정구속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항소심에서도 비슷한 결론이 내려졌고, 2019년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징역 1년 3개월형이 확정되어 2020년 8월 만기 출소하게 됩니다.
또한 2018년에는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상납받은 혐의로 압수수색을 받았으며, 건강 문제로 인해 검찰 출석이 지연되었습니다. 이상득은 휠체어를 타고 검찰에 출석했으나, 조사 중 건강 문제로 조사가 중단되었고, 이 사건에 대해서는 기소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이상득의 정치적 경력을 크게 흔들어 놓았으며, 이상득은 한국 정치사에서 복잡한 양면성을 지닌 인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상득: 정치적 관계와 경력
이상득(李相得)은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정세균 전 국무총리와 의외의 친분을 유지해왔습니다. 비록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정당에 소속되어 있지만, 대기업에서의 경력과 정세균의 뛰어난 대인관계 덕분에 정치적 대립 속에서도 인맥을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강래 전 국회의원과도 친분이 있는 이상득은 다양한 정치적 교류를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넓혀왔습니다.
이상득은 2004년 6월 5일, 제17대 국회의 개원식에서 국회의장 직무대리로 첫 회의를 주재했습니다. 이 회의는 국회의장이 선출되지 않은 상태에서 최다선 의원인 이상득이 주관하게 되었고, 김원기 의원이 전반기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상득은 자신의 지역구인 경상북도에서 6선의 기록을 세우며 단 한 번도 낙선하지 않은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이 지역은 보수정당의 공천만 받으면 당선이 확실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상득은 국제 관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2010년 리비아와의 외교 문제 해결을 위해 특사로 파견되었으며, 2011년에는 리비아 정부의 유혈 진압에 대한 규탄 결의안에 기권하여 카다피와의 인연을 고려했습니다. 또한, 2012년에는 일제 강점기 동안 유출된 문화재 반환에 기여한 공로로 감사패를 받는 등 문화재 보호에도 기여하였습니다. 이상득은 자신의 고향인 포항에 공적비가 세워졌으나, 이 비가 세워진 직후인 2024년 10월 23일에 향년 89세로 별세하였습니다. 이상득의 정치적 경력은 한국 현대사 속에서 복잡한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