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휘성 : 운명을 달리한 가수, 그에 대해 알아보자.

celebrity_blog 2025. 5. 1.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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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성(본명: 최휘성, 崔輝晟)은 1982년 2월 5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면목동에서 태어났으며, 2025년 3월 10일 향년 43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발인은 2025년 3월 16일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 진행되었고, 장지는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마명리 광릉추모공원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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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성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해주 최씨 가문 출신으로, 신체는 171cm에 60kg이고 혈액형은 O형이다. 그는 어머니 김용숙과 남동생 최혁성과 함께 살았으며, 다양한 학력을 보유한 인물이다. 서울면목국민학교와 염창중학교를 졸업하고, 마포고등학교와 아현직업학교 실용음악과를 거쳐 선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중퇴하였다. 이후 국제사이버대학교에서 경영정보학을 전공하며 학사학위를 취득하고,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는 문화컨텐츠학 석사 과정을 마쳤다.

휘성은 2002년 정규 1집 《Like A Movie》로 데뷔했으며, 타조엔터테인먼트 소속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또한, 그는 증산도에서 신앙 생활을 하였으나, 후에 무종교로 전향했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대한민국 육군에서 병장으로 복무하며, 훈련소 조교로도 활동하였다.

휘성: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 프로듀서

 

휘성은 대한민국 음악 산업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가진 아티스트로, 그의 경력과 음악적 업적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정받았다. 그는 단순한 가수가 아니라, 싱어송라이터, 프로듀서, 그리고 보컬 트레이너로서도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의 음악적 여정은 수많은 도전과 노력의 결과물로, 그가 걸어온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며 휘성은 자신만의 음악적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1. 데뷔 전: 어려운 환경에서의 출발

 

휘성의 어린 시절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자서전에서 그는 가난한 집안 환경에서 자란 사실을 고백하며, 어린 시절 동생과 함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다고 밝혔다. 당시 그는 다른 아이들처럼 휴대전화를 가지지 못하고, 대신 삐삐를 빌려 쓰며 생활했다. 음악을 배우고자 했지만, 13만 원이라는 큰 학원비를 마련하는 것이 어려워 부모님께 말을 꺼내는 것조차 고심했다고 한다. 이 시절의 휘성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위한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연예계에 입문한 계기는 중학교 시절 댄스팀에 가입해 백댄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휘성은 SM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들의 백댄서로 활동하며 무대 경험을 쌓았다. 이후 그는 베이비복스의 소속사였던 DR 뮤직에서 4인조 그룹 'A4'의 멤버로 잠시 활동했지만, 당시의 목소리는 지금의 휘성과는 사뭇 다른 하이톤의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이때의 활동은 그가 가수로서의 역량을 쌓는 데 중요한 경험이 되었지만, 대중적인 인기를 끌지 못하고 그룹은 해체되었다. 휘성은 이 시기를 "진짜 흑역사"로 회고하며, 그 경험이 그를 더욱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되었음을 인정했다.

2. 음악적 역량의 성장

 

아이돌 그룹 활동 후, 휘성은 많은 방황을 겪었지만, 그로 인해 그는 더 강한 의지를 갖게 되었다. 직업고등학교인 아현직업학교 음악반에 입학한 휘성은 당시 친구들보다 음악적 재능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밤마다 산속에 들어가 혼자 노래 연습을 하며 성장을 다짐했다. 이 후, 경찰이 그를 산속에서 본드 냄새를 풍긴다고 출동할 정도로 그는 노래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결국 그는 6개월 동안 하수도 관리 시설에서 8시간씩 노래 연습을 하며 지금의 가창력을 키울 수 있었다. 이 시기의 노력은 그가 데뷔할 때의 실력을 완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가수 활동: 휘성의 음악적 비전

 

휘성은 2002년, 정규 1집 Like A Movie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가수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타이틀 곡 '안 되나요...'는 당시 월드컵 분위기 속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고, 휘성은 그 해의 가요계에서 빠르게 떠오르는 스타가 되었다. 이후 2집 It's Real과 3집 For the Moment를 발표하며 휘성은 R&B 음악의 대중화를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독보적인 고음과 기교가 돋보이는 음악은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휘성은 '노래의 신'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휘성은 2005년 4집 Love... Love..? Love...!를 끝으로, 2006년 새로운 소속사인 '오렌지쇼크'로 이적했다. 그는 오렌지쇼크 계열사인 피앤제니스의 폐업 후, 팝업 엔터테인먼트로 소속사를 옮겼고, 이후 스스로 기획사를 설립하며 독립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휘성은 기획사와의 계약을 마친 후에도 꾸준히 음반을 발표하고, OST 앨범에 참여하는 등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또한, 그는 2015년에는 YMC엔터테인먼트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휘성은 초창기에는 고난이도 발라드와 기교가 많이 필요한 곡들을 중점적으로 불렀다. 그가 부른 곡들은 기교가 많은 고음과 섬세한 발음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하였고,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한 활동을 펼쳤다. 5집 이후 휘성은 무대에서의 퍼포먼스와 노래의 완성도를 동시에 추구하며 새로운 변화를 꾀했다.

4. 목소리와 발성의 변화

 

휘성은 선천적으로 기관지가 약하고 만성 비염을 앓고 있어 목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그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성대결절 수술을 받으며 목소리의 안정성을 되찾았다. 2008년, 성대결절로 인해 고생했던 휘성은 수술 후 목소리 발음이 더욱 안정되었고, 대중은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고음의 신'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짐에 따라, 일부 대중들은 그의 목소리 변화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휘성은 고음뿐만 아니라 다양한 발성 기술을 활용해 그의 음악적 폭을 넓혔다.

5. 해외 활동과 글로벌 인지도

 

휘성은 국내에서의 성공을 넘어 해외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다. 2006년, 휘성은 박정현과 함께 현대자동차의 광고 CM송을 부르며 필 콜린스와의 만남을 이끌어냈다. 또한, 영국의 유명 R&B 뮤지션 크레이그 데이빗은 휘성을 개인적으로 지목해, 2009년 'Insomnia (불면증)' 아시아 버전을 발매했다. 휘성은 Ne-Yo, Akon과 같은 세계적인 흑인 아티스트들에게도 러브콜을 받았으며, 마이클 잭슨의 곡 'You Are Not Alone'을 리메이크하여 발표하기도 했다.

6. 보컬 트레이너로서의 휘성

 

휘성은 단순한 가수를 넘어 보컬 트레이너로서도 활동해왔다. 그는 많은 후배 아티스트들에게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하며, 그들의 발성 훈련을 돕기도 했다. 빅뱅의 전 멤버들, 2AM의 조권, 소녀시대의 써니 등 많은 아이돌이 휘성의 트레이닝을 받았다. 휘성의 영향력은 무대 안팎에서 크게 드러나며, 그의 음악적 열정은 다른 아티스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7. 결론

 

휘성은 그가 걸어온 길을 통해 단순한 가수의 경계를 넘어서, 음악의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력을 미친 아티스트로 자리잡았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시작해, 다양한 도전과 실패를 극복하며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된 휘성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음악적 전설로 남을 것이다. R&B라는 장르의 대중화를 이끌었으며, 그의 목소리와 음악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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